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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Comp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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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서산 위 아스라이 남아 있던 해의 자취마저 어둠에 온전히 잠겨 들었다.
더 이상은 변명의 여지 없는 온전한 밤.
문이 열렸다.
「오랜만이구려.」
허공에 둥그러니 뜬 문. 그 문을 넘어,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저승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벽운.」
저승사자의 인사말이 끝남과 동시에 쇠가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저승사자는 자신에게로 검을 겨누는 혼령을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아시지 않나, 이제 내게 그대에게 포승줄을 들이밀 여력은 없소.」
「허면 어찌하여 나를 찾은 것이오?」
저승사자는 잠시간 벽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심한 듯 입을 뗐다.
「벽운, 이승을 떠나지 않고 삼백 년을 버티는 것만 해도 충분히 악한 업이거늘.」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그 이상의 업은 쌓지 마오.」
「경고하는 것이오?」
「이왕이면 충고라고 해 주오.」
저승사자는 간단히 말을 마친 후 다시 문 뒤로 넘어갔다. 문은 저승사자를 삼키며 스르르 닫히더니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이 있던 자리로부터 불어온 바람에 벽운의 도포 자락이 살짝 휘날렸다. 벽운은 눈꺼풀을 닫으며, 검을 쥔 손을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뜨렸다.


***


따사로운 봄 햇살 속.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긴 생머리와 원피스 자락을 나부끼며 도로 위를 걷는.
허시연. 올해 서른.
“……안 해요. 안 한다고요. 내가 전화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요? 사람 말 못 알아먹어요?”
-그래도 고객니임, 워낙 좋은 상품인 데다 늘 오는 기회도 아니고요.
“그 기회 필요 없다니까요? 평생 안 와도 상관없다고요.”
-부담스러우시면 특약 보장은 빼고…….
“안 해요. 안 해요. 안.해.요.”
-왜 안 하시는데요? 요즘 같은 시대에 암 한번 걸리면…….
“암 보험 세 개나 있다고요.”
-세 개 어디 건데요? 어디 회사냐고요.
텔레마케터의 목소리가 상당히 무례했다. 시연은 그나마 꽉꽉 누르던 짜증이 뽀록 솟는 걸 느끼며 전화기를 반대쪽 귀로 옮겨 붙였다.
“당신 이름 뭐야? 거기 어디 센터예요? 아니, 어느 회사라고 했죠? 어디다가 민원 걸면 되는지 자세하게 설명……!”
뚝.
끊겼다. 시연은 황당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았다.
“아아?”
자신은 상대방이 말하는 중이라 차마 못 끊고 다 들어줬더니, 상대방은 끊는단 말도 없이 홱 끊었다. 시연은 골이 치미는 걸 느끼며 당장 보험회사 대표번호를 검색해 전화 걸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길가의 난전이 시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연은 킬힐을 또각또각 멈춰 세우며 난전을 빤히 보았다.
뼈밖에 없는 할머니가 초라한 행색으로 나물 몇 가지 내어놓고 팔고 있었다. 나물도 할머니를 닮아 싱싱하지 않고 다 풀 죽어 있었다. 시연은 할머니의 앙상한 손을 뚫어져라 보았다.
때마침 할머니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시연은 인상을 쓰며 일단 전화부터 끊었다. 그러면서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현금이 얼마 없다. 시연은 인상을 더 세게 구기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쳇, 하며 만 원도 채 되지 않는 전 재산을 죄다 꺼냈다.
“할머니.”
“으응?”
“깻잎 주세요. 얼마예요?”
“으응? 삼천 원.”
“그럼 두 바구니 주세요. 아, 아니다. 세 바구니. 세 바구니 주세요.”
돈 되는 만큼 다 사서는 봉지를 흔들며 다시 길을 가기 시작한다. 휴대폰을 꾹꾹 눌러, 보험사에 다시 민원 전화를 걸기 시작하며.


***


국내의 내로라하는 기업 중 하나인 휘명그룹.
그 휘명그룹 본사의 중역들이 죄다 한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절로 위엄이 느껴지는 무겁고 중대한 자리이건만, 정작 이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로 한 주인공은 회의 시작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에 임원들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시계를 살피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했다. 상석에 앉아 있는 정 회장은 실내 모든 이들의 불만을 피부로 느끼며 주먹으로 이마를 짚었다.
정인후…… 이놈을 대체 어째야 할까.
정 회장의 큰 주먹에 잔뜩 힘이 서려 벌벌 떨리기 시작할 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인후의 비서가 문을 벌컥 열며 호들갑을 떨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그를 보면서, 정 회장은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는 길에 사고가 좀 있어서…… 죄송합니다.”
비서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연신 허리를 숙이건만, 정작 지각을 한 장본인인 인후만은 여유롭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입장했다. 그는 사죄는커녕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 넣은 무례한 태도로 회의실을 유유히 가로질러 앞으로 갔다.
그는 발표를 해야 할 자리에 멈춰 서더니 화면 자료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 일순간 모두를 향해 돌아섰다.
그를 보면서, 그의 비서인 선재는 초조하게 양손을 맞잡았다. 여기까지 힘겹게 데려온 것에 대한 수고는 없는 걸로 할 테니 제발, 제발, 제발…… 이번 프레젠테이션만큼은 약속한 대로 제대로 해내 주세요, 본부장님. 제발, 제발, 제발!
“술 마셔서 어지러우니까 발표는 다음에.”
선재의 뇌에 벼락을 내리꽂으며, 인후는 발표 자료를 비웃듯이 한 번 힐끗 보았다. 그러곤 들어왔던 그 자세 그대로 걸어 회의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1.


“뭐, 선?”
똑같은 제안에 똑같은 말로 대답한다.
다만 여자는 거짓말이라고 말해달라는 듯 절망하고, 남자는 의외로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며 픽 웃는다.


***


두 사람이 선보는 날.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니까? 알았어, 엄마.”
시연은 고층 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한적한 고급 카페 안에서, 휴대폰 너머로 짜증 섞인 말투를 뱉어 내며 근처의 테이블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주시하는 건 갓난아이를 데리고 있는 젊은 엄마들의 테이블. 엄마들은 다정하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차 테이블 위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면서.
-허시연! 너 엄마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다니까.”
-너 정말 이번 선 망쳐 먹으면 알지? 엄마 허튼소리 안 해!
“알아, 알아, 알아. 알았다니까? 엄마, 나 끊어야겠다.”
-왜? 어머, 정 본부장 도착한 거야?
“어어어. 엄마, 나 끊어.”
시연은 대충 거짓말로 둘러대곤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더 유심히 아기엄마들을 지켜보았다.
점장도 매니저도 부재중이라, 점원들은 누구 하나 가서 말려 볼 용기도 못 내고 초조해하고만 있었다. 가서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며 선뜻 나서지 못하는 점원을 흘낏 본 후, 시연은 남에게 안 들릴 만큼 작게 혀를 찼다.
그 사이 아기 엄마들은 기저귀를 다 갈았는지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한데 어째 마무리가 이상하다. 누런 기저귀를 치우기는커녕 대충 뭉쳐 테이블 한편으로 슬쩍 밀어 놓는 게 아닌가.
기저귀를 그대로 둔 채 카페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시연은 눈을 양쪽으로 쭉쭉 찢었다.
“아이 이뻐. 우리 뿡이, 이제 시원해져쪄?”
아기 엄마들이 혀 짧은소리를 내며 카페 밖으로 나갔다. 카페의 점원들은 아기 엄마들에게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한숨만 쉬다, 그제야 테이블로 다가갔다.
“잠깐! 봉지.”
시연이 늘씬한 몸을 일으키며 점원을 향해 말했다.
“네, 손님?”
“센스 없긴. 빨리 봉지. 빨리.”
재촉하자 점원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비닐봉지를 가져다주었다. 시연은 아기엄마들이 어디쯤 가나 눈으로 좇으며 기저귀를 얼른 비닐봉지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카페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기엄마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연은 도도하게 걸으며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러면서 걸음에 점점 속도를 붙여 어느덧 아기 엄마들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시연은 아기엄마들을 따라 지하의 주차장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내려왔다. 그러다 아기엄마들이 주차된 차에 사이좋게 올라타는 걸 보곤 얼른 다가가 차창을 톡톡 쳤다.
“뭐예요?”
차창이 슬며시 내려가더니 안에 탄 엄마가 의아하게 올려다봤다. 시연은 말없이 따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창문을 더 내리라는 손짓을 취했다.
“뭐야, 이상한 아가씨네. 뭐예요? 으앗!”
잽싸게 창문 안으로 기저귀를 털어 넣었다. 봉지 채 던져 넣는 게 아니라 대충 뭉쳐져 있던 기저귀가 활짝 펼쳐지도록 시원하게 털었다.
“아악!”
누런 잔해에 침범당한 차 시트와 옷을 보며 아기엄마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연은 봉지도 마저 던져 넣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늘씬한 몸매와 우아한 원피스 차림이 부끄러울 정도로, 총총총 뒤도 돌아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카페 점원들은 이젠 지친다는 표정으로 카페 중앙의 손님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젊은 엄마 혼자였다. 그녀는 카페의 티슈로 아기의 아랫도리를 구석구석 열심히도 닦았다. 그녀가 티슈 냄새를 맡으며 구수하다고 좋아하는 걸 보면서 점원들은 하얗게 질렸다.
점원들이 자기네들끼리 쿡쿡 찌르며 서로 네가 가서 말려 봐, 하며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창가에 앉아 있던 수려한 남자 손님이 갑자기 점원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에 여자 점원 하나가 쪼르르 다가가자, 남자는 그녀에게로 상체를 빼며 입을 달싹였다.
“야. 저기 가서 역겨우니까 꺼지라고 전해.”
점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점원은 어쩔 줄을 모르고 머뭇거리다가, 남자가 짜증 어린 눈빛을 띠는 걸 보곤 총총총 움직여 아기 엄마에게로 향했다.

작성일 2019.08.02 12:59:41
최종수정일 2019.08.02 12: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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